[GK HISTORY ROAD]폭군을 품은 어진 덕, 비극의 역사에 잠든 거창 신씨(居昌 愼氏)
- 박주은 기자
- 입력 2026.05.20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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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GKNEWS] 박주은 기자 = 역사 속에서 ‘연산군’이라는 이름은 잔혹한 폭정과 광기의 대명사로 기억됩니다. 하지만 그 잔혹한 폭군 옆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여인이 있습니다. 바로 연산군의 정비(正妃)이자,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으로 강등되었던 거창 신씨(居昌 愼氏)입니다.
오늘 GKNEWS ‘HISTORY ROAD’에서는 화려한 명문가의 딸로 태어나 조선 최악의 폭군을 남편으로 맞이하고, 끝내 폐비의 비운을 겪어야 했던 신씨의 삶을 되짚어봅니다.
1. 세종의 외손녀, 조선 최고의 명문가에서 태어나다
거창 신씨는 당대 최고의 명문가 출신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거창부원군 신승선이었고, 어머니는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딸 중모현주 이씨였습니다. 즉, 신씨는 세종대왕의 외손녀라는 고귀한 혈통을 지니고 태어난 인물입니다.
1488년(성종 19년), 그녀는 동갑내기였던 왕세자(훗날 연산군)와 가례를 올리며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494년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조선의 당당한 국모(왕비)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2. "칼을 거두소서"… 폭군을 막아선 유일한 여인
조선왕조실록은 폐비 신씨에 대해 "어진 덕이 있어 화평하고 후중하고 온순하며 근신하였다"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연산군이 후궁들을 총애해도 투기하지 않고 오히려 후하게 대접했으며, 아랫사람들을 은혜로 보살폈습니다. 성격이 불같고 잔인했던 연산군조차도 이런 신씨만큼은 깊이 존중하고 소중히 여겼다고 전해집니다.
그녀의 어진 성품과 담대함이 가장 잘 드러난 사건이 바로 1504년 발생한 갑자사화입니다.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의 사사 사건에 분노하여 성종의 후궁들을 처참하게 살해한 뒤, 장검을 들고 계모인 자순왕대비(정현왕후)의 침전으로 가 행패를 부렸을 때였습니다. 살기등등한 연산군 앞을 가로막고 눈물로 옷소매를 잡으며 극구 만류한 사람이 바로 왕비 신씨였습니다. 광기에 사로잡혔던 연산군도 아내의 간곡한 만류에 결국 칼을 거두고 물러섰습니다.
3. 중종반정, 고모와 조카가 나란히 맞이한 비극
하지만 아내의 내조와 간언으로도 연산군의 몰락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1506년, 박원종 등이 주도한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연산군은 폐위되었고, 왕비 신씨 역시 하루아침에 폐비가 되어 사저로 쫓겨나게 됩니다.
이 반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거창 신씨 가문은 참혹한 멸문의 화를 입었습니다. 신씨의 오빠이자 중종의 장인이었던 좌의정 신수근은 반정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살당했습니다.
더욱 아이러니한 비극은 신수근의 딸(단경왕후 신씨)이 반정으로 즉위한 중종의 왕비가 되었으나, 친정아버지가 반정 세력에 죽임을 당했다는 이유로 단 7일 만에 폐위된 점입니다. 결국 고모(연산군 비)와 조카(중종 비)가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나란히 폐비가 되어 사저에서 함께 한을 달래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4. 사후에야 이뤄진 약속, 연산군 옆에 잠들다
폐위된 연산군이 강화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난 후에도, 신씨는 홀로 남아 자식들의 비참한 죽음(폐세자 황과 창녕대군의 피살)을 지켜보며 피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절망 속에서도 그녀는 남편의 명복을 빌며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 1537년(중종 32년), 66세의 나이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내가 죽거든 꼭 연산군 옆에 묻어달라"
그녀가 남긴 마지막 유언에 따라, 중종은 그녀를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위치한 연산군의 묘소 옆에 나란히 안장해주었습니다.
[기자의 시각]
조선 최악의 폭군 뒤편에는 역사가 미처 다 기록하지 못한 '현모양처'이자 가장 자애로웠던 국모가 있었습니다. 가문의 몰락과 자식들의 죽음이라는 가혹한 운명 앞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았던 거창 신씨. 그녀의 삶은 권력의 무상함과 역사 속 여인들의 잔혹한 잔혹사를 대변하는 슬픈 이정표로 남아있습니다.
GKNEWSON 박주은 기자(begi5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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