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K뉴스온=박주은 기자]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서울의 그 어떤 길보다 짙은 고독과 낭만이 교차하는 길을 만나게 된다. 바로 ‘정동길’이다. 지금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나 직장인들의 호젓한 산책로로 사랑받고 있지만, 불과 130여 년 전 이곳은 대륙과 해양의 거대 열강들이 대한제국의 운명을 두고 치열한 외교 전쟁을 벌였던 격동의 중심지였다.
붉은 빛이 바랜 벽돌 한 장, 고풍스러운 아치형 창문 너머에는 우리가 미처 다 알지 못했던 구한말의 아픈 외교 비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정동길
외교의 각축장이 된 정동, 열강의 공사관이 모여든 이유
조선이 개항한 이후, 정동은 순식간에 세계 외교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정동이 외교가의 중심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임금의 거처인 경운궁(지금의 덕수궁)과 가장 가까운 안전지대였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터를 잡은 것은 미국이었다. 뒤이어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세계 열강들이 잇따라 정동에 공사관을 개설했다. 당시 정동길은 갓 부임한 서양 외교관들의 마차가 오가고, 서양식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활보하던 ‘서울 속의 작은 세계’이자, 조선의 운명을 쥔 거대한 체스판이었다.
아관파천의 빛과 그림자, ‘구 러시아공사관’의 하얀 탑
정동길 끝자락, 정동공원 언덕 위에는 쓸쓸히 솟아오른 하얀 벽돌 탑이 하나 있다. 바로 사적 제253호 ‘구 러시아공사관’의 일부다. 1896년 2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 황제가 세자(순종)와 함께 가마를 타고 궁을 탈출해 피신했던 곳, 즉 ‘아관파천(俄館播遷)’의 현장이다.
고종은 이곳에 머문 1년 동안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국권을 지키기 위해 밤낮으로 외교 채널을 가동했다. 친일파 정권을 몰아내고 독립협회의 설립을 지원한 것도, 군대를 정비한 것도 모두 이 러시아공사관 안에서 이루어진 비밀 외교의 결과물이었다. 르네상스풍의 화려한 공사관 건물은 6·25 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되고 지금은 전망탑만이 남아, 그날의 긴박했던 외교 비사를 묵묵히 대변하고 있다.
을사늑약의 통곡이 번진 곳, 덕수궁 ‘중명전’
정동길 깊숙한 골목 안쪽에 자리한 ‘중명전(重明堂)’은 황실 도서관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2층 벽돌 건물이지만, 우리 역사상 가장 뼈아픈 현장이기도 하다. 1905년 11월 17일 밤,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군대의 강압 속에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러나 중명전은 슬픔의 공간만은 아니었다. 고종 황제는 이곳에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친서를 작성했고,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는 비밀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굳게 닫힌 중명전의 창문 뒤에서 고종과 외교관들이 나누었던 고뇌와 결단은,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 했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박주은 기자의 시선] 과거의 거울로 미래의 길을 묻다
정동길의 붉은 벽돌 건물들은 단순한 근대 건축물이 아니다. 대국(大國)들의 자국 이익 중심 외교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쳤던 우리 선조들의 외교적 고군분투가 담긴 기록화다.
130여 년이 지난 지금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 역시 구한말의 격동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미·중 갈등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 등 거대한 외교적 파고 속에서, 정동길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으며, 철저한 국력과 지혜로운 외교만이 평화를 지키는 유일한 열쇠라는 점이다.
이번 주말, 책 속의 역사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역사'를 만나고 싶다면 정동길을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붉은 벽돌이 들려주는 은밀하고도 위대한 외교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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