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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영칼럼]"내가 할게요"

  • 황지영 기자
  • 입력 2026.10.13 12:0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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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적표엔 남지 않아도 삶에는 오롯이 남아 세상의 한쪽을 조용히 밝히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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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의 한 초등학교. 당시 학교 주변은 유행에 가장 민감하고 현란한 네온사인을 뽐내는 상가가 즐비했으며, 최신 패션을 선도하는 젊은이들로 넘쳐나던 한국에서 가장 핫한 거리 중 하나였다.

 

그래서일까? 고학년 여자아이들은 짧은 반바지에 긴 윗도리로 하의실종을 연출하고 연한 화장을 한 채 등교하곤 했고, 남학생들도 겉멋이 한껏 들어간 모습으로 다니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학교였다. 그해 5학년 담임을 맡으며 만났던, 맑은 눈을 가진 한 제자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맑고 큰 눈동자에 키가 조그마하던 정훈이(가명).

 

 

대걸레를 든 맑은 눈의 아이

 

3월 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을 때였다. 정훈이가 혼자 대걸레로 복도 바닥을 닦고 있었다.

 

"정훈아, 일찍 왔네. 오늘 당번이니?"

 

그 시절만 해도 모둠별로 돌아가며 학급 청소를 하던 때라 대수롭지 않게 물어보고 약간의 칭찬만 건넨 뒤 넘겼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정훈이는 당번이 아닌 날에도 일찍 오는 날이면 말없이 복도와 교실을 깨끗이 물걸레질하곤 했다. 내가 칭찬이라도 해주면 그 맑은 눈으로 해맑게 웃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렇게 내 눈에 들어온 정훈이를 유심히 관찰해 보니, 매사에 긍정적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궂은일을 찾아 나서는 참으로 특별한 아이였다. 성실함에 비하면 공부 쪽 성과는 다소 아쉬웠지만, 아이의 아침 봉사는 지속적이었다. 5월경부터는 마치 당연한 일처럼 일찍 와서 청소를 하더니, 나중에는 옆 교실 복도까지 말끔히 닦아내곤 했다.

 

"정훈아, 너는 진짜 대단하다. 이런 게 공부 잘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거야. 너 뭐가 돼도 될 거야. 선생님이 장담해."

 

나 역시 아낌없는 칭찬과 지지를 보냈다. 2학기가 되자 학습은 다소 부족했어도 아이들은 정훈이의 부지런함과 봉사심을 인정해 주었고, 정훈이는 학급 임원이 되었다. 한 해 동안 힘들고 어려운 일에 솔선수범하며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정훈이 덕분에, 우리 학급은 다른 학급에서 흔히 일어나는 문제도 적었고 교과 선생님들께도 칭찬받으며 매일을 소중하고 기쁘게 보낼 수 있었다.

 

 

"힘들어서요" … 요즘 아이들의 무기력증

 

얼마 전 또 다른 5학년 교실의 풍경이다.

"○○야, 저 앞의 판넬 좀 치워줄래?"

TV 화면을 가리던 판넬을 치우려 일어나던 아이가 "에고고…" 하며 가늘게 소리를 냈시길래 왜 그러냐 물으니 "힘들어서요"라고 대답한다. "아니, 경로당에 가시지 왜 초등학교에 오셨어요?" 하고 웃어넘겼지만 마음 한 구석은 씁쓸했다.

 

요즘 초등학생들에게는 일종의 무기력증 같은 것이 보인다. 저학년 때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꼬물거리며 신나게 무언가를 하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수업 시간에 멍을 때리거나 새로운 도전을 거부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 한참 호기심에 이것저것 도전해야 할 시기에, 꽉 짜인 학원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과부하가 걸린 탓이다.

 

우리 어른조차 가파르게 빨라지는 사회 속도를 따라가기 힘든데, 귀한 자녀들을 '학습의 바다'에 던져놓고 어떻게든 알아서 헤엄쳐 살아남으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작 일상에 필요한 소소한 일, 몸으로 직접 해야 하는 일들은 시키지도 않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드니, '생각은 많고 몸은 천근만근인' 어른으로 자라나는 것은 아닐지 염려스럽다.

 

 

몸을 움직이는 수고, 비워주는 교육의 힘

 

살다 보면 머리로 해결해야 하는 일보다 몸을 움직여야 풀리는 일이 더 많다. 머리도 쓰면 쓸수록 자라지만 몸도 마찬가지다. 내 주변을 돌아보고, 누군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먼저 하고, 작은 불편쯤은 기꺼이 감당해 내는 힘 역시 살아가는 데 있어 배워야 할 중요한 능력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오래전의 정훈이를 떠올린다. 공부를 아주 잘했던 아이도, 특별한 재능을 뽐내던 아이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도 시키지 않은 아침, 조용히 대걸레를 들고 복도를 닦던 그 아이는 다른 사람이 미처 보지 못한 일을 먼저 보았고, 누군가 해야 할 일을 기꺼이 자신의 몫으로 만들 줄 알았다.

 

"이런 게 공부 잘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거야. 너 뭐가 돼도 될 거야."

그때 정훈이에게 건넸던 내 말은 지금도 틀리지 않았다고 믿는다.

아이들에게 더 많은 지식을 채워주는 일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비워주는 일'도 필요하다.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의 자유, 학교가 끝난 뒤 시계도 보지 않고 골목을 누비다가 "밥 먹어라!" 하는 엄마의 목소리에 아쉽게 집으로 들어가던 시간의 자유. 그리고 집과 학교에서 작은 일 하나쯤은 "내가 할게요!" 하고 먼저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우리 아이들에게 돌려주고 싶다.

 

성적표에는 기록되지 않지만 삶에는 오롯이 남아 빛을 발하는 것들이 있다. 누군가를 위해 몸을 움직이는 수고, 함께 살아가는 기쁨, 그리고 스스로 해냈다는 작은 뿌듯함.

 

우리 아이들이 머리만 큰 어른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과 기꺼이 움직이는 두 손을 가진 어른으로 자라기를 소망한다. 언젠가 그 아이들이 세상의 어느 한쪽을 조용히 닦아내며 살아갈 때, 우리가 사는 사회는 지금보다 조금 더 따뜻하고 살 만한 곳이 되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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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영 (시인 / 교육가)
• 이력: 대한민국 초등교원으로 38년 봉직 / (현) 글로컬 교육원 이사 / 여러 기관에서 초등 통합 과정 지도 중
• 학력: 상담심리학 석사
• 등단: 1997년 『아동문학』 동시 등단
• 저서: 『선생님, 선생님, 우리 선생님』(2003), 『꿈이 있는 교실』(2007)
• 시집: 『숨바꼭질』(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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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1

  • 황경선2026-10-15 14:06:00

    아마도 정훈이는 공부 성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스스로 책임을 맡고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행동하는 학생입니다. 그러한 인성으로 정훈이는 커서도 사회를 더 따뜻하게 만드는 비료가 될것입니다. ​‌
    더불어 아이를 경쟁에서 앞서게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몫을 기꺼이 감당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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