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칼럼] 세종사이버대학교 국방융합학과 김원호 교수
학원비 결제 문자가 울리면 부모는 잠시 안도한다. 아이가 뒤처지지 않도록 무언가를 해주었다는 마음 때문이다. 유명 학원의 단계 테스트를 통과하고 선행반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어느새 자녀의 성취뿐 아니라 부모의 성실함을 증명하는 훈장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문득 묻게 된다. 우리는 언제부터 아이의 배움을 학원에 맡기는 것으로 부모의 역할을 다했다고 믿게 되었을까.
학원에서 미적분을 배우고 영어 문법을 익혔다고 해서 그것이 곧 아이의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설명을 듣는 일과 스스로 이해하는 일 사이에는 생각보다 깊은 강이 흐른다. 수업 시간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막상 혼자 문제를 풀 때 손이 멈추는 경험을 누구나 해봤을 것이다. ‘들어본 것’과 ‘아는 것’을 혼동한 결과다. 배운 내용을 자기 언어로 정리하고,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확인하며, 틀린 문제 앞에서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복습은 같은 문제를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일이 아니다. 남의 설명으로 들어온 지식이 자신의 사고 속에 뿌리내리도록 만드는 과정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메타인지’다. 조금 어려운 말처럼 들리지만, 뜻은 단순하다. ‘나는 지금 무엇을 알고 있는가?’, ‘왜 이 부분을 설명하지 못하는가’를 스스로 살펴보는 능력이다. 수업 내용을 노트 한 장에 요약하거나 부모에게 말로 설명해 보는 것만으로도 이해의 빈틈은 드러난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설명은 중간에서 막힌다. 그 막힘은 부끄러운 실패가 아니라 공부가 다시 시작되어야 할 자리다. 정답을 맞힌 문제보다 왜 틀렸는지를 끝까지 들여다본 한 문제가 더 오래 남을 때도 있다.
그러나 ‘자기주도학습’이라는 말도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부모와 자녀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조언은 현실의 거실에서 쉽게 변질된다. “오늘 학교에서 무엇이 궁금했니?”라는 질문은 어느 순간 “학원 숙제는 다 했어?”라는 확인으로 바뀐다. 대화는 사라지고 점검표만 남는다. 아이가 스스로 답을 찾도록 기다려 주기보다 정답을 빨리 알려주는 일이 편하기 때문이다. 성적이 흔들리면 부모의 불안은 질문의 모양을 빌려 잔소리로 흘러간다. 그런 거실에서 아이는 생각하는 법보다 부모가 원하는 답을 눈치채는 법을 먼저 배운다.
더구나 ‘자기주도학습’이 부모에게 또 하나의 완벽한 관리자가 되라고 요구해서도 안 된다. 늦은 시간 퇴근한 맞벌이 부모에게 매일 긴 학습 대화를 이끌라고 말하는 것은 현실을 외면한 처방일 수 있다. 경제적 여건과 돌봄 시간의 차이를 무시한 채 모든 책임을 가정에 돌리면 교육 격차는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포장된다.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아이의 모든 일정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짧게라도 질문을 들어주고, 모른다는 말을 허용하며, 실패를 곧바로 비난하지 않는 환경을 만드는 데 있다. “왜 그것도 모르니?” 대신 “어디에서 막혔니?”라고 묻는 몇 초가 공부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때로는 가르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더 어려운 교육이다.
생성형 AI는 이미 자료를 찾고, 글의 초안을 만들며, 문제 해결의 절차를 제안한다. 앞으로 기계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더욱 능숙하게 처리할 가능성은 크다. 그렇다고 인간에게 ‘왜(Why)’만 남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인간에게 더 절실해지는 것은 무엇을 질문해야 하는지 판단하고, AI가 내놓은 답의 근거와 빠진 맥락을 의심하며, 그 결과를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하고 책임지는 능력이다. 그럴듯한 문장을 곧바로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도 필요하다. 질문 없는 지식은 빠르게 낡고, 판단 없는 편리함은 쉽게 의존이 된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AI를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 답일까. 금지만으로는 이미 열린 문을 닫기 어렵다. 오히려 AI가 만든 답과 자신의 답을 나란히 놓고 무엇이 더 설득력 있는지, 어떤 근거가 빠졌는지를 묻게 해야 한다. 답을 얻는 속도보다 답을 검토하는 힘을 가르쳐야 한다. AI를 대신 생각해 주는 기계로 사용할지, 생각을 넓혀 주는 도구로 사용할지는 결국 질문하는 사람의 몫이다.
그래서 AI 시대의 생존법은 더 많은 정답을 외우는 데 있지 않다. 혼자 생각하고, 질문하고, 틀리고, 다시 자신의 언어로 답을 구성하는 힘에 있다. 학원이 ‘어떻게(How)’를 가르칠 수 있다면, 가정과 학교는 ‘왜(Why)’를 묻고 판단을 연습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녀에게 빈 책상 앞에서 멍하니 생각할 시간을 허락하고 있는가. 계획을 지키지 못한 하루와 답을 찾지 못한 방황까지 배움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아이의 미래를 걱정해 채워 넣은 일정표가 오히려 아이 자신의 질문이 들어올 자리를 지워 버린 것은 아닐까.
어쩌면 자녀에게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학원 시간이 아니다. 누구의 재촉도 없이 자기 질문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조용한 공간, 틀린 답을 내놓아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거실, 그리고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하니?”라고 묻고 끝까지 들어주는 한 사람일지 모른다. AI가 답을 더 빨리 내놓을수록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그 방향은 학원 안내문이 아니라 아이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김원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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